대한불교조계종 대성사
百濟佛敎 初傳 法輪聖地
牛眠山 大聖寺 史記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 우면사 대성사 사기
삼국사기(三國史記) 제 24권 백제본기(百濟本記) 제 15대 침류대왕(枕流大王)편에 이르시기를 침류대왕 원년인 갑신년[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九年)]인 서기 384년 9월에 서역 천축 인도의 마라난타(摩羅難陀) 대사께서 중국 동진을 거쳐 해동 백제의 서울인 한주(漢州)에 이르렀으므로 침류대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마라난타 대사를 친히 환영하여 궁중에 모시고 극진한 예로써 공경하였는데 백제에는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다음해 을유년인 서기 385년 2월에 광주(廣州)인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득도(得道)한 승려(僧侶)가 십인(十人)이라 하였으니 백제불교 승가생활(僧伽生活)의 시초라 하겠다.
삼국유사 제3권 난타가 백제의 불교를 열다
백제본기에 이르시기를 제 15대 침류대왕이 즉위한 갑신년(동진 효무제 태원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진나라로부터 오시니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인 을유년에 새 도읍지 한산주에 불사를 창건하고 득도한 스님이 열 분이시었으니 이는 백제불교의 시초라 하겠다. 또 제 17대 아신 대왕이 즉위한 태원(동진 효무제의 연호) 17년 2월에 하교하여 불법을 숭배·신앙하여 복을 구하게 하였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童學)이라 한다(그의 이적은 고승전에 상세히 보인다).- 難陁闢濟 讚嘆曰난타벽제에 찬탄하여 가로되
- 天造從來草昧間아무것도 없을 때 무엇을 만들려면
- 大都爲伎也應難재주부리기에 얼마나 어려울까
- 翁翁自解呈歌舞노래 부르고 춤을 출 줄 알기만 하면
- 引得旁人借眼看옆사람 끌어내어 구경이야 않으랴
原文
三國遺事 百濟本紀云 第十五(僧傳云十四誤) 沈流王 卽位 甲申(東晋孝武帝太元九年)에 胡僧摩羅難陀 至自晉하니 迎置宮中하여 禮敬하고 明年乙酉에 創佛寺於新都漢山州하고 度僧十人하니 此百濟佛法之始라. 又阿莘王卽位 太元十七年二月에 下敎崇信佛法求福하다. 摩羅難陀는 譯云童學(其異迹詳見僧傳)이라. 讚曰 天造從來草昧間하니 大都爲伎也應難이라. 翁翁自解呈歌舞하니 引得旁人借眼看이라.우리나라 불교전래는 해로(海路)와 육로(陸路)의 두 길이었다
해로(海路)로는 서역 천축 아유타국(阿踰陀國)의 허황옥(許黃玉)공주께서 해동가야 김수로대왕에게 건무(建武) 24년인 무신(戊申) 서기 48년에 오빠 장유화상(長遊和尙)과 같이 오셨을 때 불사리를 봉안한 파사탑을 모시고 온 것이 가야불교의 시초가 된 것이다. 김수로대왕과 허황옥황후의 사이에 십왕자(十王子)와 이 공주(二公主)를 두셨는데 첫째왕자는 후일 제 2대 거등대왕(居登大王)이 되시어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그리고 둘째 왕자, 셋째왕자는 어머니 성(姓)인 허씨(許氏)로 사성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칠왕자(七王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을 따라 가야정사(伽倻精舍)에서 출가(出家) 삭발위승(削髮爲僧)하였다. 가야불교(伽倻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인 가야정사지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176번지 일대의 봉림산 봉림사지(鳳林寺址)이다. 이곳이 바로 가야불교(伽倻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이다.칠 왕자는 창원 가야정사에서 장유화상을 모시고 수행한 뒤 합천 가야산으로 자리를 옮겨 수행하다가 실상산(實相山)인 하동 지리산 칠불암에서 성도하였던 것이다. 중국 불교의 전래는 중국 후한 명제의 사신 채음등의 간청으로 서역 천축 인도에서 영평 10년 서기 67년에 가섭마등 법사 님과 축법난 법사님은 함께 낙양에 이르시어 백마사에 기거하시면서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藏經)을 번역하였다. 이것이 중국불교의 시초이다.
가야불교의 전래는 서기 48년이니 중국불교 전래보다 19년을 앞선 것이다. 육로(陸路)로는 고구려불교·백제불교·신라불교의 전래가 있다. 고구려불교의 전래는 삼국유사 순도조려(順道肇麗) 고구려(高句麗) 본기(本記)에 이르시기를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대왕(小獸林大王) 2년 임신(壬申) 서기 372년에 관중(關中) 장안(長安)에 도읍을 한 전진(前秦)의 부견대왕(符堅大王)이 사신과 순도대사(順道大師)를 파견하여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함께 모셔왔다.
또 소수림대왕 4년 갑술(甲戌) 서기 376년에 아도 화상(阿道 和尙)이 진나라에서 고구려에 오셨다. 그 이듬해 을해(乙亥) 서기 377년 2월에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대사를 계시게 하였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 화상을 계시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불교의 시초이다.
- 順道肇麗 讚曰순도조려에 찬하여 가로되
- 鴨淥春深渚草鮮압록강 봄이 깊어 저 물가에 풀빛 곱고
- 白沙鷗鷺等閑眠백사장 갈매기 한가로이 조는데
- 忽驚柔櫓日聲遠홀연히 멀리서 들려오는 노젓는 소리
- 何處漁舟客到煙어디서 고깃배가 손님 싣고 오는가
신라불교의 전래는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의하면 신라 제 19대 눌지대왕(訥祗大王) 시대에 묵호자(墨胡子) 사문(沙門)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모례장자(毛禮長者)의 집에 오셨다. 일선군 도개부곡(道開部曲)에 살고 있는 모례장자는 본래 가야국의 왕손(王孫)으로써 그의 시조(始祖)는 김수로대왕이시었고 그의 시조모(始祖母)는 불교의 나라 천축 아유타국의 허황옥(許皇玉)공주로써 김수로대왕의 왕비로 오셨을 때에 그 오빠 허보옥(許寶玉) 장유화상(長遊和尙)과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파사탑을 모시고 가야에 오심으로부터 가야는 건국 초기로부터 역대의 대왕과 왕궁에서는 불법을 숭배하고 신봉하게 되었다. 모례장자의 비조(鼻祖)는 신라에 귀화하여 일선군 도개부곡의 모례장자의 대에 이르러 모례장자는 조상의 빛나는 얼을 이어 받아 불법을 숭상하고 있었다. 모례장자는 묵호자 사문을 맞이하여 집안에 굴실을 만들어 편히 계시게 하였다. 마침 중국 양(梁)나라에서 사신으로 하여금 의복과 향을 보내 왔었다. 임금과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 명인들에게 물어 보게 했다는데 묵호자 사문이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향(香)이라는 것인데 불에 태우면 향기가 좋으므로 신성(神聖)에게 정성드릴 때에 쓰는 것이요. 신성은 불(佛)·법(法)·승(僧)인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 향을 사르면서 기원하면 반드시 영묘한 증험이 있으리라」 하였다. 때마침 대왕의 딸인 공주가 병이 위중하므로 사람을 시켜 묵호자 사문을 모셔 그 향을 피우고 기원을 하니 공주의 병이 곧 나았다. 대왕이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주었는데 얼마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신라 제 21대 비처대왕(毘處大王) 시대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세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장자의 집에 오셨는데 묵호자 사문과 같았다고 한다. 수년을 지난 후 병도 없이 입적(入寂)하시고 시자 세분 스님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강설하며 독송하니 왕왕 믿고 받드는 자가 있었다. 이것이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시초이다.
- 難陁闢濟 讚嘆曰난타벽제에 찬탄하여 가로되
- 天造從來草昧間아무것도 없을 때 무엇을 만들려면
- 大都爲伎也應難재주부리기에 얼마나 어려울까
- 翁翁自解呈歌舞노래 부르고 춤을 출 줄 알기만 하면
- 引得旁人借眼看옆사람 끌어내어 구경이야 않으랴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 우면산 대성사 사적진언에 의하면 「예로부터 한강 북녘 남산인 목멱산(木覓山)과 한강 남녘인 이곳 대성사(大聖寺)가 위치한 우면산(牛眠山)은 소남소녀(小男小女)의 형국을 지어 이 생기에서 약수가 흘러나와 두 줄기의 생명수를 이루었다. 마침 마라난타 대사께서는 서역 천축 인도와 동토 중국을 거쳐 해동의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시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크게 고생하시게 되었다. 이에 생명수를 찾아 우면산 기슭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세우고 이 생명수를 드시어 수토병을 고치셨다」한다. 그러하기에 우면산 대성초당은 백제불교(百濟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가 되었다. 대성초당지(大聖草堂地)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3동 산 140번지 일대를 말한다. 또 근세에 있어 선(禪)과 교(敎)와 율(律)에 가장 밝으신 대선지식(大善知識)이며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번역 내지 저술에 이바지한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을 위한 자비 보살이신 석가여래부촉법 제 68세 용성진종(龍城震鍾)대사께서 대각응세 경술년 서기 1910년 경술 국치의 치욕에 의해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七佛庵) 칠불선원(七佛禪院) 조실로 계시다가 이곳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초당에 주석하셨다.
이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은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이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시대에 숭유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의 계맥이 희미하게 되었다. 이에 지리산 칠불암 금담장로께서 그 제자 대은스님과 함께 불전 서상수계의 기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서상수계(瑞相受戒)가 대은스님에게로 내려져 조선불교 중흥율 초조가 되시었다. 그리하여 그 스승에게 계법을 전해 제 2조 금담율사, 제 3조 초의율사, 제 4조 범해율사, 제 5조 선곡율사, 제 6조 용성율사에게 율맥이 전하여졌다. 용성진종대종사께서는 석가여래부촉법 제 68세이신 동시에 조선불교 중흥율 제 6조가 되시었다. 용성진종대사께서는 우면산(牛眠山) 대성초당(大聖草堂)에 주석하시면서 다음해 불교중흥 민족중흥을 발원하고 서울 종로 봉익동 1번지에 민가(民家)를 구입하여 개조·수리하여 불교를 개혁하고져 대각사(大覺寺)를 이룩하셨다.
9년여 동안의 이적(理的) 보림과 사적(事的) 교화의 공덕으로 기미독립선언문 조선민족대표 33인 중 제 1번 서명에 천도교 대표 손병희(孫秉熙)교주님, 제 2번 서명에 기독교 장로회 대표 길선주(吉善宙)목사님, 제 3번 서명에 기독교 감리회 대표 이필주(李弼柱)목사님, 제 4번 서명에 불교 대표로 백용성(白龍城)대사가 차례로 서명하고, 이어서 제 5번에 김완규(金完圭) 천도교 교주님, 제 6번 김병조(金秉祚)목사님, 제 7번 김창준(金昌俊)목사님, 제 8번 권동진(權東鎭) 천도교 도사님, 제 9번 권병덕(權秉德) 천도교 도사님, 제 10번 나용환(羅龍煥) 천도교 도사님, 제 11번 나인협(羅仁協) 천도교 도사님, 제 12번 양전백(梁甸伯) 장로 목사님, 제 13번 양한묵(梁漢默) 천도교 도사님, 제 14번 유여대(劉如大)선생님, 제 15번 이갑성(李甲成)선생님, 제 16번 이명룡(李明龍) 장로 목사님 · 제 17번 이승훈(李昇薰)선생님, 제 18번 이종훈(李鍾勳) 천도교 도사님, 제 19번 이종일(李鍾一) 천도교 월보과장님, 제 20번 임예환(林禮煥) 천도교 도사님, 제 21번 박준승(朴準承) 천도교 도사님, 제 22번 박희도(朴熙道) 청년회 위원님, 제 23번 박동완(朴東完) 청년회 위원님, 제 24번 신홍식(申洪植) 감리 목사님, 제 25번 신석구(申錫九) 목사님, 제 26번 오세창(吳世昌) 천도교 도사님, 제 27번 오화영(吳華英) 청년회 위원님, 제 28번 정춘수(鄭春洙) 감리 목사님, 제 29번 최성모(崔聖模) 전도사님, 제 30번 최린(崔麟) 천도교 보성학교장, 제 31번 한용운(韓龍雲) 스님, 제 32번 홍병기(洪秉箕) 천도교 장자님, 제 33번 홍기조(洪基兆) 천도교 도사님 등이 서명하시어 독립운동을 전개 15세 연하의 제자와 같은 만해 한용운 대사를 앞세워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들과 손과 손을 맞잡고 발과 발을 맞추어 대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이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민족대표 등과 같이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 시민통치 국가보안법 제 7조에 적용,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루시었다. 이 때에 이곳 우면산 대성초당은 일본인 경찰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다. 석가여래부촉법 제 69세 동헌완규 대선사님의 증명아래 석가여래부촉법 제 70세 불심도문 법사는 뜻있는 불교도의 옹호로써 4차에 걸쳐 민간인의 소유에서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사 도량입구 불사현황은 아래와 같다.